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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반달 반달 아무리 내려다봐도 풍족하건만 뭐가 보인다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청구서를 갖다 붙이는지 풀칠 당한 벽면이 거칠다 인간의 소원을 줄이려면 내 몸을 반으로 접는 수밖에 #서정시학 #물속도시 #손지안시인 #반달 #욕심 #소원 더보기
시 - 길 길 저 아비의 십 센티 길에서 출발했건만 툭 하면 거기에 대고 욕했지 찰나에 튀어나온지라 기억도 없나 봐 하기야 비밀이 거기 숨어 있었다면 걷다가 힘들 때마다 욕도 나오겠지 그놈의 시발점의 길, 행복했거나 불행했거나 죽도록 걸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십 센티 이쪽저쪽이라는 거 황홀감에서 너도 이 길을 만들어 봐서 알잖아 시발 길 #서정시학 #물속도시 #손지안시인 #길 #행복했건 #불행했건 #인생의길 더보기
시 - 계좌이체 계좌이체 "우째 빈손으로 가겠노? 거기도 돈 없으마 안 될 낀데... " 통곡으로 마지막 인사를 마친 미망인이 구부러진 손가락으로 콧물을 훔치며 꼬깃꼬깃 구겨진 천 원짜리 몇 장을 펴 고인의 가슴 매듭에 걸자 쭈뼛쭈뼛 서 있던 두 아들이 만 원짜리 두 장이 혹시나 붙었을까 손가락에 침을 묻혀 가며 한 장을 빼더니 어머니를 따라 한다 금이었고 옥이었던 자식들과 처마 밑 시래기를 널어 말리며 함께 늙어온 아내를 두고 마지막 용돈을 받은 이분은 그 돈으로 무언을 하실까 만 원에 떨리던 두 아들의 손과 미앙인의 손톱 밑에 낀 흑 때를 바라보며 고인은 말없이 계좌이체를 하고 계신다 #서정시학 #물속도시 #손지안 #계좌이체 #고인 #마지막선물 더보기
시 - 봄비, 그래도 봄비 아직도 너는 내 가슴 한복판을 지나가는 꿈길이어라 그래도(島) 사연 많은 이 섬에 내 사연 하나 더 보탠다고 무겁겠냐만 절망의 늪에서는 눈물 놓고 물어보는 무당 같은 섬 어려움을 이긴 자라면 누구나 소유자지만 쉽게 버리는 자에게는 불탄 자리 재보듯 냉정한 섬 보이지 않는 사람의 가슴에만 떠다니다가 잎담배처럼 돌돌 말아 한숨으로 태우면 연기처럼 사라지는 섬 수천 번이나 다녀가신 아버지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섬 #서정시학 #손지안시인 #봄비 #그래도 #섬 더보기
시 - 마네킹 마네킹 도시는 유리벽으로 욕망을 흔든다 기술 면허를 입고 고체로 굳어진 지 오래 눈을 감아본 적 없어 불 꺼진 밤에도 눕지 못하는 운명 화려한 쇼윈도 생활이 그렇다지만 마구 벗겨져 팔을 빼고 다리를 빼고 날마다 능지처참이다 곰이라도 되어 백 일 간 마늘만 먹는 꿈을 꾼다 그러나 아무리 나를 버려도 다시 나로 되돌아오는 거만한 부활이 슬프다 작은 풀꽃 앞에서라도 조아리면 유연해지려나 유리 밖 유행은 늙어 세상을 떠도는데 나는 늙지도 못한다 #서정시학 #손지안시인 #마네킹 #물속도시 #시집 더보기
시 - 따뜻한 수갑 따뜻한 수갑 고향으로 숨어든 한 여자 뒤에 한시도 미행을 멈추지 않던 두 그림자 묵은 골목길 끝 작은 사글셋방에다 서글픔을 풀었는데, 꾹꾹 눌러 담은 슬픔이 먼저 와 앉아 있었다 가난한 소리의 조각들이 어두운 방을 떠돌았고 차가운 방구들은 여자의 체온으로 견디려 했다 마음의 잡초를 뽑으며 꿈을 심던 고향의 낯선 거리 시린 바람을 껴안고 집으로 돌아가던 깊은 겨울밤, 감각을 잃은 손가락이 몇 번이나 유서를 쓰게 했다 두 발은 가위가 되어 과거를 잘라내며 걷고 있었지만 매일 지상에서 허락된 마지막 하루 그럴 때마다 이불 속에 숨어 있던 해맑은 웃음이 뛰어나와 엄마라며 손을 잡고 따뜻한 수갑을 채웠다 날마다 키가 자라던 두 그림자 -시인 손지안- #서정시학 #물속도시 #손지안시인 #따뜻한수갑 #힘든삶속 #딸둘.. 더보기
시 - 사라지는 왕국 사라지는 왕국 벗어나고픈 과거에 붙잡힌 것처럼 꽁꽁 묶인 당신 편한 세상으로 가셨다더니 겨우 1미터 땅속이었나요 거기서는 또 무슨사연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으셨나요 살아서나 죽어서나 가슴이 썩어 문드러지는 건 매한가지군요 시간의 흐름을 잊고 뼈와 살을 발라내는 진짜 고통을 이겨낸 당신 살아서 고통은 고통도 아니라고 견딜 만하거든 그냥 참고 살라네요 미래로 가는 나의 옛길이 될 만삭의 어머니 뱃속 같은 곳으로 돌아가면 영원한 안식인 줄 알았지요 그러나 뼈가 삭는 아픔까지 견뎌야 무無의 경지에 이른다니 솔바람 한 줌의 환생이 참으로 어렵군요 살아 있는 자들의 두려움인가요 그리움마저 지우는 굴착기 소리가 산을 울리네요 -시인 손지안- #서정시학 #물속도시 #손지안시인 #사라지는왕국 더보기
시 - 어머니의 손 어머니의 손 낮 햇살이 짧아지고 옷깃을 여미면 앞 단추 가지런히 맞추며 새벽닭 울 때까지 털옷을 짜던 어머니의 손이 생각난다 거북이 등처럼 두툼한 손으로 한올 한올 따라 지혜의 길을 일러주듯 밤새 움직이던 손 살면서 좌절의 보따리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을 때 조각난 꿈의 부스러기를 힘껏 잡아 올리도록 가르쳐준 희망의 그물 손 한 잔의 따뜻한 차를 놓고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대바늘 촘촘히 당기시던 어머니의 손이 나와 내 손을 잡아 줄 것 같은 그리움의 손 #서정시학 #물속도시 #손지안시인 #어머니의손 #희망의손 #그리움의손 #그리운어머니 더보기